우사단_청년장사꾼 김연석
먼저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신 건지부터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청년장사꾼이라는 단체는 상행위를 통해서 다른 것들을 하고자 하는 단체에요. 예를 들면 상행위를 통해서 지역 활성화를 한다든지, 상행위를 통해 청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든지. 상행위를 기본으로 해서 그 친구들에게 창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거죠. 상행위를 통한 지역 활성화라고 하는 측면은 청년장사꾼의 큰 모토이기도 하고요. 나라는 사람은 건축을 전공 하고 기획 일을 했지만. 지역이라고 하는 하나의 틀로 건축과 도시, 기획, 장사를 아울러 묶을 수 있거든요. 나는 장사라든지 지역, 기획, 일련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지역 활성화를 하기 위해서 장사를 해보고, 또 어떨 때는... 그런데 이 이야기 내가 너한테 하지 않았냐?
이야기하기도 했고 다른 인터뷰에서도 많이 하셨는데, 일단은 저에게 정리 된 것은 없으니까요.
음, 그래. 아무튼 지역으로 하나로 묶을 수가 있단 말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예전에 건축을 할 당시에, 학생 때. 자원봉사로 가르치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엄마는 정신지체 3급인가? 집이 불우했어.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동생이 둘이 있었고. 그런 친구였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고 잘 했고. 고려대를 붙었어. 그런데 아빠가 학교를 못 가게 하는 거야. 집을 돌볼 사람이 그 친구 밖에 없으니까, 여자가 고등학교만 나오면 됐지 무슨 대학이냐고. 애가 또 착해서 그 말을 들었네. 대학을 안 갔어. 아빠가 취직시켜준 곳에 취직을 했지. 더 돈도 많이 주는 곳에 취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공장에 들어갔데. 그래서 그 친구는 공장에서 일을 했지. 그리고 나는 군대를 갔는데. 갔다 와서 이 친구 이야기를 물어보니까 자살을 한 거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이게 단순히 한 개인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개인이 아닌 구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역에 관심을 갔기 시작했던 것 같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실제로 많지가 않지. 많지 않기도 하고. 그때는 마을이니 하는 이야기가 있지도 않을 때였고 그래서 더 그렇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다 보니 재미도 있었고. 건축이라는 것 안에서 그것을 풀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 당시 대학교 3, 4학년 때 했던 프로젝트들을 나중에 와서 들추어 보니까 그런 것을 많이 했더라고. 빈민가를 위한 공동주택이라든지 한강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공공공간이나 낙후된 공간을 바꾸는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더라고. 도시에 관련된 프로젝트들에. 나중에 보니까. 그때는 약간 집착 같았거든. 분노. 실은 그런 상황에 대해서 분노했었고. 그렇게 분노와 집착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게 흥미였던 거고, 책임감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하면서 건축에서는 해답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흥미를 잃었던 것 같아. 그 이후에 도시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가게 되었고 도시 일을 1년 정도 했었는데 1년 동안 해보니 도시는 정책적인 부분을 건들어야 되는 부분이 많더라고. 내가 관에 들어간다든지 연구소에 들어간다든지 해야 하는데 그건 적성에 너무 안 맞고. 그래서 그걸 그만 두게 되었고 그 다음에 했던 일이 기획 일이었어. 기획을 하면서도 그런 걸 하는 기획 일만 했어. 전통시장 프로젝트라든지 낙후된 지역에 문화예술 교육을 한다든지. 그런 식의 교육을 조금 했지. 그런데 그것도 약간 기획자로서 어디에 투입이 되는 것이 괴리 같은 게 생기더라고. 태생적인 한계. 내가 그곳의 거주민이 아니고, 내가 그곳의 상인이 아니다 보니 내가 진정성을 다해서 그 분들에게 노력했고 그것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거든. 그런데 아예 시작이 다르니까 바라보는 것이 완전 달라.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질까 생각이 들더라고. 예를 들어 시장인데 그곳에서 공연을 하면 공연하는 날은 장사가 안 된다는 거야.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런데 그때 약간 번쩍했어. 장사가 잘 되기 위해서 공연을 하는 건데 ‘단 하루라도 장사가 안 되면, 그게 좋을까.’, ‘과연 맞는 방법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어. ‘틀린 방법이다.’라고 생각이 들었어. 처음에는 ‘그러면 내가 마을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마을에 들어가서 뭘 할 거야. 뭐 먹고 살 거야. 그러면 뭘 해먹고 살아야 되나. 그렇다고 예산집행 받아서 그걸로 나의 인건비를 충당하면서 사는 것도 지속가능해 보이지 않았어. 어쨌든 내가 뭔가 자가 능력을 발생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 ‘뭐가 있을까?’ 거기서 건축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동네 건축을 뭘 하겠어. 수도 배관 고칠 것도 아니고. 그런 기술도 없고. 그러면 예전부터 막연하게 ‘나 장사하면 존나 잘 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장사를 못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단 말이야.
예전에는 장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아르바이트 정도고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 ‘장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 친구는 꿈도 크고 고민이 많은 친구야. 나한테 상담전화 오고 만날 그랬거든. “장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자기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하고 싶다. 그게 장사인 것 같다.”고 그래서 그러면 “장사해라.” 그랬는데 “그렇다고 시시하고 너무 아무 것도 없는 장사는 하기 싫다. 재미있는 장사를 해보고 싶다.”고 그래서 나도 어차피 장사해야 되니까 “같이 해보자.” 이렇게 돼서 그 당시에는 ‘장사와 문화가 만났다, 지역에서’라는 틀이었거든. 그 큰 틀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고.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되었지. 그러면서 몇 가지를 찾았어. 장사를 하려면 동네에 들어가야 하니까. 초창기 자본이 4천만 원 정도였는데 그걸 가지고는 유명한 상권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들어가자니 이건 도대체 될 싸움이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어디에 들어가야 하나. 머리를 굴렸는데 그때 나는 문화기획자 출신이니까. 예술가 친구들이 많잖아. 그런데 예술가 친구들이 들어가는 동네마다 동네가 좋아지는 거야. 막 유명해지고 뜨고. 처음에는 ‘얘네가 들어가면 유명해진다.’ 정도의 생각이었는데 원인을 분석해본 적은 없었거든. 그런데 그때 소호나 첼시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때였고. 어떤 것이 들렸었냐하면 ‘걔네가 들어와서 떴다.’가 아니라 ‘걔네가 들어가서 떴는데 쫓겨났다.’는 것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어.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생각이 드는 거야. ‘쫓겨났으면 그곳을 다른 누군가가 채울 텐데 그들은 사업성이 있어서 들어온 걸 텐데, 그러면 왜 그들은 사업성이 있어서 돈을 벌고 왜 얘네들은 쫓겨나나. 무슨 차이가 있나. 둘 다 물건을 파는 사람인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기술의 문제인 것 같다. 장사를 하는 방법, 장사를 하는 방식, 장사를 하는 기술이 없는 것 같다. 장사를 잘 해야 되는데 장사를 실제로 못해. 장사를 할 마음도 없지. 장사를 하는 것이 되게 창피하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요즘은 그런 인식이 많이 없어졌는데 그때만 해도 ‘뭘 팔아’ 이러면서 비싸게 올리는 허세가 있을 때여서. 지금은 그런 모습이 작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죽은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장사하는 기술을 알려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람들과 같이 마을을 잘 만들어서 상권을 잘 끼워 넣고. 우리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 상권이 좋아지는 걸 가지고 장사를 잘 하면 되고. 이 사람들도 우리가 장사나 이런 것들을 많이 알려줘서 그 사람들에게 장사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우리가 그 상태 그대로. 월세가 오르면 오른 만큼 올려주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푼 꿈을 꾸었지. 어쨌든 상권을 활성화 시킨다는 측면에서 우사단 마을은 실패야. 왜 실패라고 느끼느냐면 초창기 세팅이 되게 중요한데 초창기에 우리가 접근을 하는 방식 자체가 상인이 아니었어. 그때는. 그때는 나랑 단이 정도만 참여를 했었는데 그때 나는 장사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러니까 장사에 대해서 어드바이스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전까지 했었던 일이 기획이다 보니 기획 쪽으로 많이 풀어냈지. 다행히 기획으로는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하고 그것이 또 이슈가 되어서 또 다른 효과를 보고 있지만 상권으로서 이곳이 가치 있는 곳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그 대신에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 많이 생겼지. 예를 들어서 커뮤니티. 장사는 아무리 사이가 좋고 그래도 결국에는 경쟁체제라서 친하게 지내더라도 서로 경계를 하는데 커뮤니티는 완전히 개념이 다르지. 경복궁에 열정감자와 열정꼬치가 오픈하고 나서는 여기에서 장사를 하는 건 포기했어. 얼마 안 돼서 포기 한 거야. 장사 쪽으로는 힘들겠다.
시작은 ‘사원 앞 카페 벗’이었잖아요.
맞지. 그걸 통해서 다른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했지. 재미있게. 실제로 되게 재미있어.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은 되게 많은데.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개발 이슈 때문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기는 힘든 상황이고, 우리가 이 사람들과 너무나 관계망이 좋다보니 이 부분을 고려해야 하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여기에 커피숍이 잘 될 것 같다고 커피숍을 차릴 수는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 이제 밥집들이 들어오는데 밥집을 여기에 차릴 수도 없고. 그건 싸우자는 거니까.
실제로 ‘사원 앞 카페 벗’이 사라지고 이쪽으로 사무실을 옮겼을 때 말들이 있었잖아요.
옛날에. 우리는 사무실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었어. 우리가 장사로 성장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했데. 이렇게 커피 머신이 들어오고 인테리어를 하는데.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거지. 왜냐면 장사는 생업이거든. 생업과 닿아 있고 우리가 어디에 들어가도 웬만하면 장사로 안 져서 ‘장사로 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겁이 나지. 그럴 수 있지. 겁이 나기도 하고 ‘쟤네는 경복궁에서 잘 하면서 여기에서까지 그래야 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겠지. 그래서 어느 순간이 넘어가고 나서 우리는 여기에서 장사라고 하는 색깔을 싹 빼고 문화적인 것만 남겨놓았어요. 실제로 계단장 할 때도 사람 많고 앞에 자리도 있는데 굳이 우리 셀러를 안 까는 거지. 뭐 하러 깔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슬람 사원 앞에 ‘사원 앞 카페 벗’을 연 거예요?
자리를 고르는 세 가지 기준이 있었어. 첫 번째로 ‘모 상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여기는 경리단, 이태원일 거고 서촌은 종로, 광화문, 북촌, 삼청동이 모 상권이야. 모 상권이 있어야 바운스가 돼서 계속 오는 손님들이 생겨요. 콘텐츠가 조금씩 쌓였을 때 그것만을 목적으로 오는 일은 굉장히 어려워. 남산 어딘 가에 뭐가 생기면 그것만을 목적으로 가려면 콘텐츠가 번지르르 해야 하는데 그건 완전 도박인 거지. 콘텐츠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완전 파리만 날릴 거거든. 그런데 모 상권이 있으면 이태원에 왔다가 들려 볼 수 있지. 그런 손님들을 노려보는 측면 하나. 두 번째는 ‘콘텐츠가 많아야 한다.’ 왜냐면 우리 스스로는 콘텐츠가 약하기 때문에. 그때는 또 처음 시작할 때였고. 지금이야 열정도 프로젝트를 우리 스스로 콘텐츠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걸 자신하면서 들어갔지만 그때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상태에서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 한 것 같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주변에 콘텐츠가 많은 곳, 이슬람 사원. 나는 재민이를 알기 전에 워크스를 먼저 알았어. 내가 기획 일을 할 때 메인 디자이너의 후배들이 워크스거든. 일은 던져놓으면 밤새 작업해서 아침에 출력하고.
질려하겠어요.
날 별로 안 좋아해. 일 할 때 만나서. 하도 어렸을 때 봐서 내가 그 친구들은 너무 어리게만 보니까. 그 이후로는 같이 일을 안 해보았으니. 그런데 요즘 워크스 일 잘 한다고 하더라고. 물론 그때도 잘 했었고. 어쨌든 그래서 실은 워크스에 놀러온 거였어. 워크스에 놀러왔는데 이 동네가 너무 좋은 거야. 전화했었거든 “그 동네 어때? 괜찮아?”, “이 동네 앞으로 좋아질 것 같다.”고 해서 한 번 답사차. 가게도 오픈했다고 해서 놀러오는 겸 왔는데 동네가 너무 매력적인 거지. 그리고 세 번째 조건은 ‘임대료가 싸야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조건을 충족하는 동네가 실은 많지 않았어. 그 당시에 경리단길도 임대료나 권리금이 안 비쌌을 때였는데 경리단길과 이 동네가 있었고 성수동, 서촌. 모두 찍어두었던 동네들이었어. 그 조건이면 실은 언젠가는 되는 지역이거든. 누가 그곳에서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인 거지. 지금은 다 궤도에 올라온 동네들이잖아. 그렇게 몇 곳을 찾았고 처음 선택했던 곳이 이 동네였어. 가장 임대료가 싸기도 했고 동네가 너무 신기했어. 처음에 언덕을 올라와서 오른쪽으로 도니까 골목이 너무 신기한 거야. 지금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처음 보면 신기한 동네잖아. 왼쪽에는 사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골목길이 뻗어있는데 전기줄이 얼키설키 엮여있고.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 작업실들이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 많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에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팀이 길종상가가 있었고 노동연구소 재민이, 워크스 정도. 이 친구들과 재미있는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동네에 들어오게 되었지. 그래도 우리는 장사를 해야 하니까 그 나마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많이 뒤집어썼지. 권리금 1500만원 주고 들어갔는데.
원래는 뭐였는데요?
원래는 부동산. 그래서 내가 다시는 부동산 자리 안 얻잖아. 부동산은 가장 처음에 들어왔다가 가장 마지막에 나가거든. 권리금 엄청 받고. 하여튼 그렇게 들어오게 되었어.
맨 처음 한 가게는 왜 커피였어요?
우리는 보통 장사를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아이템을 정해. 처음에 시작을 할 때 절대로 하지 않을 아이템으로 약속한 것이 있었거든. 커피, 삽겹살, 치킨. 이 세 종류였어. 가장 포화상태인 것. 무조건 이건 피한다. 이거 말고 다른 아이템을 한다.
지금은 다 있네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