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잃어버린 고향으로

정의진프로젝트, 정진영 인터뷰

2011년 9월 8일,

정의진 프로젝트 현진건의 ‘고향‘ 연출자 정진영님 인터뷰,

20시 00분부터 2시간동안.

외대 앞 카페 Think in coffee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힐 : 전방위문화 인터뷰 웹진 더 힐입니다. 저희 독자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정 : 저는 정진영이고요. 나이는 올해로 30살 되었고 여자에요. (웃음) 그렇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연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스물두 살 때부터 연극하러 왔다 갔다 했고요. 지금은 막 연출을 하려고 약간 뒤집기 하는 아기같이 시작한 연출이에요.

힐 : 연극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계기가 있었나요?

정 : 일단 고등학교 때 제가 책을 좋아해서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문학의 사대 장르 중에 희곡이 있지만 희곡은 잘 안 배우잖아요. 그 희곡이 알고 싶어서 제가 연극부를 만들고 희곡을 좀 읽고 그러다가 대학을 저의 의지와 관계없는 곳으로 갔어요. 부모님은 아무래도 취업 같은 걸 원하니까요. 착한 척 하느라고 원서 하나 넣고 언어치료학과랑 아동학과 전공을 해서 졸업을 했지만 중간에 통계학하고 해부학하고 배우는데 나랑 너무 안 맞으니까 도저히 못 배우겠더라고요. 그래서 2년 다니고 휴학을 했는데 그때 제가 살고 있던 지역에 한국연극협회 최초로 지역 시 단위에서 전국연극제를 열었어요. (거기서) 봉사활동자를 뽑았고 제가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휴학했을 때 국문과나 문창과로 편입을 할까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생각이 항상 있었어요. ‘누가 요새 소설을 읽을까?’, ‘누가 요새 시를 읽어?’ 그런 생각이 되게 많았을 때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래도 전국에서 각 시도별에서 1위로 뽑힌 경연대회다 보니까 사회극부터 심리극까지 다 본거죠. ‘아! 연극에 힘이 있구나, 연극에 세상과 소통하는 힘, 그리고 치유의 힘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어요. 그 때가 스물두 살 여름이었죠.

저희 어머니는 ‘일단 대학은 나와야 한다.’였어요. 그래서 대학졸업을 하고 제가 언어치료학과를 나와서, 지역 시에서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시청공무원 제의가 오고 운 좋게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연극강사가 되었어요. 봉사활동 한 것도 있고 그 해 처음으로 교사자격증이 있는 거랑 연극 3년차 자료까지 뽑았는데 제가 스물두 살 때부터 했으니까 스물다섯이 딱 되는 때였고 그 자료를 냈는데 뽑혔죠. 저희 시에서는 저 하나 되었고 몇 년 만에 된 거여서 고민을 했어요. 돈이 얼마 안 돼요. 육십, 팔십 수인데, 그렇게 되면 시간당 4만원인 거거든요. 250만원? 그 정도 되는데 시청공무원을 하느냐 고민을 나름대로 하다가 제가 원하는 것을 지원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지원을 해서 된 거였고 연극을 너무 하고 싶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강사활동을 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연극을 하기로 하고 일 년 정도 돈을 모아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 당시가  참여정부 막 시작해서 지원예산이 많이 들어왔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문화예술아카데미가 있는데 무대 쪽은 굉장히 유명해요. 근데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출과가 있다가 없다가 했는데 그게 또 생긴 거예요 커리큘럼도 좋았고 무엇보다 등록금이 쌌기 때문에 그때 들어갔죠.

힐 : 그게 아르코 공연예술아카데미군요.

정 : 네, 거기서 1년 다니고 1년 휴학하고 또 연극치료 배웠는데 돈이 좀 많이 들어요. 개인분석 받고 하면. 그래서 돈 벌려고 일 년 휴학했다가 들어가서 졸업하고 그게 2009년. 그래서 지금이 2011년. 그렇게 되었어요.

힐 : 아르코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정 : 일단 제가 11기였고요. 13기까지를 마지막으로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는 문을 닫았어요. 왜냐하면 어쩔 수없이 문화예술 정책이라는 것이 문화예술은 소수의 인원이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문화예술을 하는 동안에 이 친구들도 어떻게 표현하면 학생의 입장이지만 전문인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2년제 대학을 졸업하거나 현장경험이 2년 정도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현장경력이 있는 학생들도 오기 때문에 현장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수업을 어느 정도 못 올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커리큘럼상은 수업을 다 참여해야지만 졸업이 되고 이런 상황이에요. 대학도 아닌데 빡빡하다보니까 졸업자가 점점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교수님들도 가르칠 때 너희들이 연극인이 되거나 전문인이 되길 바라셨지 여기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듯이 학점 잘 따라고 가르치진 않으셨기 때문에 좀 여유로웠어요. 밥도 잘 사주시고 으쌰으쌰 해주시고 그랬는데.

일단 정책에서 보면 졸업인원이 적어요. 수료자가 많고 졸업생이 적으니까 없애버린 거죠. 그래서 문제는 인력이 없어요.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기관이 없어요. 특히 저희 무대하고 조명 같은 경우는 시설이 전국 최고였어요. 그리고 졸업해서 나온 친구들이 굉장히 잘 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젠 맥이 끊긴 거죠. 조명이랑 음향이랑 무대는 연출과, 연기과가 없어져도 살아남았었는데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거예요. 지금 여기 나온 친구들 족족 다 잘하고 있는데 지금은 (아카데미가) 없고 그런 상황에서 나라에서 지원을 하고 정책을 한건 아예 소수만 뽑자 해서 한두 명 뽑는데 그건 나라 정책에서 할 것이 아닌 부분이 있죠. 장점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학생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30대 중반정도 되는 연출가를 키우는 것이니까. 그 밑의 연출가를 키우는 것은 없어요. 아니면 5,600만원 내고 아니 5,600이 뭐야 대학원은 훨씬 비싼데. 저도 대학원을 못 간 게 그 이유거든요. 등록금이 너무 비싸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아쉬운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하네요. (웃음)

힐 : 여러 활동들을 하셨지만 지도교사 생활을 하시면서는 힘든 점이 없으셨나요?

정 : 일단 내가 애들한테 마음이 있어서 혼내는 거지만 그거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거고 애들이 저한테 아쉬운 걸 이야기하는 건 그 아이들은 아직 애들이고 내가 애들을 그만큼 좋아하고 그러니까 괜찮아요. 사실 혼낼 때는 많이 혼내는 것도 있거든요. 저도 사람이라 속상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애들이 그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