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1월, 갓 군대를 제대한 스물세 살의 청년은 대경 바스컴이라는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SR업체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IMF가 터진 직후, 10년 동안 근무했던 회사에서 나와 ‘글로벌’한 SR업체를 운영하겠다는 포부로 온누리 음향이 문을 열었다. 98년 4월부터 낙원상가를 지키고 있는 온누리 음향의 정병석 대표님을 만나 한국 SR산업의 역사와 낙원상가의 모습을 들어보았다.

온누리 음향의 시작은 1998년 4월. 89년 1월부터 대경 바스컴에서 처음 일을 하기 시작한 정병석 대표님은 청계천에서 구르마부터 끌었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구르마부터 끌었죠. 지금은 세운상가가 반이 나뉘어서 없어졌지만, 세운상가에 반 없어진 그 라인에 대경 바스컴 매장이 있었어요. 대경 바스컴은 지금은 공장까지 가지고 있는 SR쪽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에요. 그 당시에는 젠하이저 등을 수입했었는데 지금은 스피커와 엠프 제작도 하죠. 그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창고에 가서 물건 나르는 일을 심하게 했어요. 지금까지 27년 되었네요.”

그 당시 유망직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전자. 박정희 정권 때부터 쭉 키워온 세운상가의 전자는 유명했다. 어릴 적부터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정병석 대표님은 세운상가에 있던 아주TV학원을 다니면서 전자기기, 음향, 영상기기 자격증을 획득하고 한원에서 소개해준 회사에 입사한다. “그게 대경 바스컴이었죠. 1월 23일. 잊어먹지도 않아요. (웃음) 회사를 들어가서 10년 근무를 하고 나와서 독립을 한 것이 지금 이 온누리 음향이에요.”

하루 세 시간씩 10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던가. 한 회사에서 10년을 꾸준히, 성실히 일했기에 지금의 온누리 음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경 바스컴은 수입품 전문 유통회사거든요. 3, 4년간은 짐만 나르고, 일주일에 두 번씩 들어오는 걸 창고에 올리고 내리는 걸 했어요. 3년이 지나니까 영업부로 배치가 되어서 일을 배우고. 그때는 시공을 많이 했어요. 현장시공. 교회시공은 기본이고 운동장, 체육관 시공을 많이 했죠.”

낙원상가에 있던 대경 바스컴 전시 매장에서 3년간 팀장으로 근무했던 정병석 대표님은 낙원상가 257호 한 칸으로 온누리 음향을 시작, 1년 후 현재의 매장을 인수한다. 세운상가와 용산전자랜드, 낙원상가를 모두 경험한 대표님에게 낙원상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낙원상가는 기본이 3,40년이잖아요. 각각의 업주들 간에도 선후배 관계가 돈독하죠. 형제들처럼, 이웃사촌처럼 지내는 것이 낙원상가라면 세운상가나 용산전자랜드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보이는 사람, 아는 사람 인사하고 한 집만 건너면 몰랐죠.”

같은 업종으로 똘똘 뭉친 낙원상가의 특성과 다 같은 음향과 전자 쪽이지만 분야가 반대인 전자랜드와 세운상가의 특성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낙원상가는 낙원상가의 200가구가 다 알아서 도움이 안 되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다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있는 거예요. 쉬운 이야기로 흔히들 말하듯이 ‘가족 같다고’. 낙원상가는 그런 면이 있어요. 다른 것은 세운상가와 전자랜드는 사람이 계속 바뀌어요. 업주도 바뀌고. 낙원상가는 1년에 한 집이 바뀔까 말까 해요. 많이 바뀌면 한 집에서 두 집.”

처음 낙원상가에 왔을 때만 해도 이상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업주들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하고 낙원상가 200가구를 모르는 사람 없이 모두 알기에. “1년만 근무하면 다 알게 되거든요. 형, 동생하고 지내니까 굉장히 편하고 여기에 있다가 다른 곳에 가기가 쉽지 않죠. 여기가 워낙 좋으니까.”

처음 지었던 이름은 영어로 ‘글로벌 사운드’. 순우리말로 땅, 지구를 온누리라고 하기에, 큰 포부를 지닌 온누리 음향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98년 개인사업으로 시작한 온누리 음향은 2005년 온누리 음향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법인으로 전환했다. 올해는 주식회사로 전환한지 10년이 되는 해. 우리나라의 음향은 어떤 발전을 거듭했을까. 한국의 SR산업과 함께 성장한 온누리 음향 정병석 대표님의 생각은 이러했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SR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등장했는데, 그 전에는 전부 번데기 앰프에 콘을 쓰는 방식이었죠.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을 전후로 EV, JBL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완성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알맹이만 들어와서 통을 다 국내에서 만들었어요. 그렇게 판매를 하기 시작했죠.” 지금의 SR시장을 상상할 수 없는 낮은 퀼리티의 시장이었다는 그 당시, 정병석 대표님이 89년도에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전국에 SR을 하는 곳이 열 곳도 되지 않았다. 그 시장이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급속도로 성장한 결과 세계적인 제품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외국에 있는 퀼리티 높은 SR시스템은 모두 우리나라에 와있다고 보면 되요.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빠른 것 같아요. 음향은 특히나. 음향쪽은 거의 2,30년 전에 SR이 시작해서 15년 만에 전 세계의 모든 SR시스템이 다 들어와서 판매가 되고 있으니까요.”

SR산업의 수요는 30년 전에 비해 100배, 1000배 성장했다. 허나 10년 전부터는 한정된 수요에서 공급만 늘어나고 있는 상황.“SR산업이 30년 정도 된 사업인데 10년 동안 성장기를 거치고 20년 동안은 계속 확장을 한 거죠. 물론 그만큼의 수요는 생기겠지만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는 확장만큼은 수요층이 따라오지 못하죠. 공급이 넘쳐나고 업체들 간의 경쟁이 심화 되어서 사실은 피보고 살지요.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경쟁이 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