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개업한 국제미디는 42년간 낙원상가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입니다. 컴퓨터음악 관련기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커즈와일과 야마하 뮤직 코리아의 공식 대리점이기도 한 국제미디의 김용웅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국제미디가 낙원상가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국제미디는 현재 낙원상가 내 바인악기가 위치한 장소에서 국제악기로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미8군 악단에서 기타 연주를 하셨던 김용웅 사장님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밴드부를 하며 기타를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미8군에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시절 미군이 철수하면서 무대가 없어진 후 김용웅 사장님은 낙원상가에서 국제악기를 열게 됩니다.

그 당시 낙원상가에는 옷장사부터 시계장사까지 잡화가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악기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른 물건들과 함께 어우러진 종합상가였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회도 음악도 변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악기소비도 변했고 낙원상가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낙원상가에서 42년간 악기점을 운영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적은 없었을까. 김용웅 사장님은 덤덤하게 웃으며 “글세, 보람이라면 자식 키우면서 안정적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보람이죠. 어려웠던 사람들도 도와준 적도 있고. 악기가 없는 사람은 빌려주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그냥 주기도 하고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국제미디는 처음부터 미디장비를 파는 악기점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기타를 다루면서 성장했고 88년에는 인천에서 ‘콘서트’라는 이름의 기타를 수출하는 공장도 운영했습니다. 50불 정도의 저렴한 가격대의 기타를 만드는 공장은 6년 동안 계속 되었고 90년대에 들어서 미디 장비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컴퓨터로 만드는 음악시장이 생겼습니다. 노래방 기계가 한국에 보급되면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기기와 프로그램의 수요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들여왔던 미디는 일본의 아타리와 롤랜드의 사운드모듈인 사운드캠버스. 김용웅 사장님은 당시 젊은 사람들이 미디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프로그램과 인터페이스, 기기들이 회사마다 생겨났고 국제미디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미디장비를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미디장비를 손님들에게 더 잘 소개하기 위해서 국제미디의 직원들은 전공자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낙원상가에 있는 국제미디의 매장은 여섯 곳. 부서마다 각각의 악기 전공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악기는 시대적인 변화에 민감한 탓에 언제나 흐름을 주시해야한다고 말하는 김용웅 사장님. 지금도 약 30여명의 직원들이 낙원상가 내 국제미디를 지키고 있고, 김용웅 사장님도 자주 낙원상가를 찾아 매장을 둘러봅니다. 용산에 있던 이어폰 매장도 논현동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운영하고 있습니다.

낙원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음악을 즐겨들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항상 궁금해 하던 질문을 드렸습니다. “음악은 다 좋아하죠. 흔히 유행하는 음악들. 나는 재즈 같은 걸 좋아하고. 순수한 재즈. 스탠다드 재즈.” 예전에 기타를 치셨을 때도 ‘흐름에 따라 벤쳐스가 나오면 벤쳐스를 했다.’는 사장님. 오늘 인터뷰에서는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네요.

국제미디 손님의 절반은 단골손님입니다. 외상값을 안 주고 사라진 경우도 있었고 외국으로 도망 가버린 손님도 있었습니다. 시설비를 반밖에 안 주고 반은 못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사업을 알리고 싶다.’는 포부로 지은 이름 ‘국제’는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면서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외우기 좋고 잊어버리지 않는 이름이 있잖아요. 국제. 국제 좋잖아요. 국제악기에서 국제미디를 하고, 국제악기는 데리고 있던 조카에게 물려줬어요. 나는 새롭게 국제미디를 하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거죠.”

낙원상가에 오는 많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까. 김용웅 사장님은 낙원상가의 현재 모습에 대해 “옛날에는 여기가 참 공기가 나쁘고 여러 가지가 열악했는데 지금은 낙원 같다.”고 말합니다. “시원하고 정리정돈도 잘 되어있고, 시설들을 워낙 잘 고쳐주고 보수해주니까 백화점 못지않은 상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요,” 예전의 낙원상가를 기억하고 온 사람들 대부분이 놀람을 금치 못하는 것도 낙원상가 내 편의시설의 확충입니다.

국제에서 파는 악기 중에 꼭 추천하고 싶은 악기는 없을까. 김용웅 사장님의 대답을 듣고서 안일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쓰고 찾는 악기가 있는 거지 내가 ‘어떤 것이 좋다, 어떤 것이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죠.” 자신에게 잘 맞는 악기가 있다는 사장님의 말씀. 방문해주셨던 손님들에게 “고맙고, 사 가신 악기를 잘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30대 초반 처음 가게를 열면서 “나도 이제 조그맣게 사업을 하게 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는 김용웅 사장님의 고향은 충청남도 당진. 서울에 있는 명지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취미로 기타를 배우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장님의 손에서 기타는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인터뷰 전에 보았던 사장님은 미디를 다루고 계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악기점을 운영하면서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많아졌습니다. “미디도 초창기에는 조금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 발전되다보니까 부서 직원들이 맡아서 잘 하죠. 그렇지만 내가 개념은 알고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거의 비슷해요.”

김용웅 사장님은 송파에서 음악연습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친구들과 공연을 하며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이나 악단에 있던 사람들 같은 은퇴자들이 하는 팝스오케스트라가 있어요. 얼마 전까지 김포팝스오케스트라 단원을 한 적도 있고. 20명 정도 되는 악단인데 거기서 기타주자로 등록이 되어 있었어요. 후에 취미로 색소폰을 불어는데 지금은 송파윈드오케스트라라고 부는 악기로만 이뤄진 곳에서 색소폰으로 함께 하고 있어요.”

낙원상가에서 국제악기와 국제미디를 일궈온 김용웅 사장님에게 남아있는 꿈은 없을까. “항상 그걸 생각하고 있는데 캄보밴드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최소한 여섯 명은 있어야 하는데 잘 이뤄지지가 않네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이기가 힘들더라고. 또 생각이 맞아야하는데 돈보다는 재미, 봉사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따라주는 사람으로 여섯, 일곱 명으로 만들기가 힘들어요. 네 명이었다가 흩어지고 세 명이었다가 깨지고. 그거 외에는 욕심이 없어요. (웃음)”

나도 저런 멋진 꿈을 꿀 수 있을까. 혹시나 정해둔 밴드 이름은 있을까하여 사장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런 건 없고 결성이 되어야 이름도 짓는데 결성도 안 된 걸. 내가 지금 송파에서 음악연습실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이 ‘뮤직웨이’에요. 그것이 이름이라면 이름이지. 마음의 길.”

마음의 길. 시대의 흐름을 타고 순항한 ‘국제미디’가 지금까지 온 길도 마음의 길은 아니었을까. 김용웅 사장님은 마지막으로 낙원상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류가 있게끔 음악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음악을 만드는 악기를 팔아왔으니 낙원상가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죠. 여기가 아니면 사기가 어렵잖아요. 낙원상가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