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영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 레이아웃 전’. 레이아웃 속 건물이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크게 비뚤어져있다. 그는 설명한다.“육안으로 본 세상과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다릅니다.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볼 때는 마음에 드는 것은 크게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생략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그리면 렌즈가 아닌 육안으로 본 세상이 완성됩니다.”

신택리지 프로젝트 두 달 반 동안,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본 한남동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카메라로 찍은 우뚝한 한남동의 모습이 아닌, 길을 밟아 걸으며 우리가 느낀 비뚤어진 한남동을 표현하려고 했다. 우리는 한남동에서 평생을 산 사람도 아니고, 역사학자나 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서울, 청년의 눈을 지녔다. 모르는 분들을 찾아가 말을 걸며,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며, 열띤 토론을 하며, 지도를 스케치하며, 땡볕 아래 그저 헤매며. 실제 우리가 느낀 동네를 담아내기 위해서 때때로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번갈아 들이밀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담긴 활동 결과물이 나왔다.

전담했던 지도에는 한남동의 지역별 다른 색을 어떻게 표현할 지 많이 고민했다. 특히 부촌과 빈촌의 차이가 위화감 없게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빈촌에는 작은 빨간 네모들을 촘촘히, 부촌에는 큼지막한 파란색 도형들을 박아 넣었다. "언뜻 보면 보석 같아"라는 코멘트를 들었는데, 빈촌과 부촌의 껄끄러운 차이가 아닌, 한남동의 지역별 색 차이가 각기 다른 색의 보석처럼 빛나게 표현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준 한남동 팀과, 청년허브, 그리고 서울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성지은

하나의 공간이 나의 동네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그곳에 눈과 귀를 두고, 땀 흘리며 걸어 다니며, 그리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신택리지 사업을 통해 한남동을 조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이었다. 세 달 동안 참 많이도 걸어 다녔다. 거점공간이 있는 한강진역 근처를 중심으로 약 2,040,000㎡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걷고 또 걸었고, 사상 초유의 폭염이라는 날씨에 한남동 구석구석 짠 내 나는 땀방울을 흩뿌렸다. 발걸음은 한남동뿐만 아니라 이태원동, 보광동까지 가 닿았다. 걷기도 많이 걸었거니와, 사람들도 참 많이 만났다. 한남동 토박이 주민부터 장사하시는 분, 그리고 외국인까지. 그 다양한 입들은 오랜 기간 또는 짧은 기간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말들을 통해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한남동을 엿볼 수 있었다. 한남동의 지난 풍경들이 마치 어렸을 적 주말이면 텔레비전에서 해 주던 ‘주말의 명화’와도 같이 흘러갔다.

신택리지 사업은 이렇게 발과 눈과 귀로 뛴 한남동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다시 그리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이 공간은 나의 동네가 되었다. 친구를 만나러, 맛있는 것을 먹으러, 아니면 그저 지나가기 위해 한남동을 찾았던 때와는 달리, 이제 30년 전의 딸기밭과 늘어진 전선뭉치가 보이고 내가 모르는 새벽과 밤을 채웠을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내가 담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이 조사 자료집이 나의 손을 거쳐 다른 사람들에게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추억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수정

어느 동네의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다. 골목길은 거미줄처럼 갈라지다 만나고, 집들은 액자 속 그림 한 점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왁자그르르 이야기보따리를 열어젖히고, 나는 가만 귀를 기울인다.

‘여기 이 다리가 지나는 곳엔 원래 개울이 있었다고. 우리 땐 여름이면 온 동네 애들이 다 거기 나가 물장구치고 놀았지.’ 주변 풍경이 아득히 멀어지고, 저 멀리 어딘가 돌림노래 같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어른하다. 기찻길 따라 걷듯 웃음소리 따라 총총 걷는다. 마치 그 길밖에는 없는 것처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절, 가본 적 없는 곳의 이야기. 처음 듣는 것이었으나, 돌아보건대 나는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문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지척에 아이들이 있다. 여기선 누가 철수고 누가 영희인지 분간할 수도 있을 성싶다. 그 때 눈앞을 스쳐가는 얼굴들. 어라? 너는. 그래,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어떻게 너를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너와 그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도.

동네 개구쟁이 하나가 함빡 젖은 채 돌아본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 그만 나오라고 손짓 한다. 그리운 이야기 하나가, 마침내 끝이 난다.

오늘도 해묵은 이야기를 채집한답시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거기엔 무수한 ‘나’들이 남겨놓은 삶의 흔적이 있다. 50년 전에도, 500년 전에도 이렇게 어둑어둑 해 저문 풍경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이가 있었으리라. 그는 나와 다르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유기동

작은 쪽문이 바로 길옆에 나있는 판자촌과 굴지의 대기업 재벌가의 집들. 미군 부대와 이슬람 사원, 수많은 대사관들과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 그리고 성적 소수자들인 게이와 트랜스젠더. 수많은 술집과 맛집들. 다양한 문화권과 상권, 그리고 오래도록 한남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토박이 주민들까지 모두가 한남동 그 자체이다. 모든 분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그분들의 ‘삶’인 한남동을 보고, 듣고, 느끼며 자료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40년 이상 한자리를 지켜온 표구사 사장님, 1947년에 한남동에서 태어나 지금껏 한남동을 지키고 계신 부군당 당주님과 같이 한남동의 한 꼭지를 살아오신 분들과의 만남에서 인터뷰를 넘어 그 분들이 한남동을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가족을 마주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한강다리가 생겨나고 도시가 들어서는 모습을 어제 일처럼 회상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마저 들었다. 처음 신택리지 사업을 접했을 때 나는 꼼꼼한 자료 정리와 주어진 기간 내에 자료를 제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택리지를 시작하고 일주일만에 바뀌게 되었다. 지금 나에게 신택리지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한남동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과 한남동에 오래도록 계셨던 분들과의 깊은 교감’ 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소중한 것들을 많이 얻었다. 그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사람'이다. 소중한 인연으로 함께하기를 원하는 우리 팀. 경현이, 지원이, 지은이, 선영이, 수정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후기를 마친다.

김경현

한강과 남산 사이에 여울진 삶의 애환을 그 누가 알렵니까.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변했고 그 와중에 생기는 생채기도 무시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세월을 이야기하고 과정 중에 있었던, 결과에 묻혔던 지난 과오를 돌이켜 보아야합니다.

한남동과 이태원 마을의 생성에는 슬픈 역사가 배어있습니다. 아마도 뜨거운 눈물과 흘러내린 땀들이 흠뻑 땅을 적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허울 좋은 모습의 이면에, 어느 뒷골목에, 흉물스럽다고 지나쳤던 하꼬방 건물에도 인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옳고 그름으로 그들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듯이 마을도 지금의 모습만 보고 좋은 동네, 살기 좋은 동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