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의 순간 / 김경현
"우리 아들 참 예쁘게도 빻아놓았네."
눈물 콧물 찔찔 흘려가며 곱게 빻은 마늘을 보고, 울 어마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드신다. 물론 그 말은 '앞으로도 부탁한다.'의 노골적인 표현일 게다. 회사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일 반찬거리를 걱정하는 어마이 뒷모습이 눈앞에 아련해서 발동한 이 작은 용기는 결국 나를 찐득거리는 손과 온 방에 가득한 마늘냄새로 몰아넣었다. 다른 집처럼 그냥 사먹지 왜 우리 집은 항상 사서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라도 사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궁시렁 궁시렁을 꿀꺽 삼킨다.
‘그래도 어마이 웃는 것이 보기 좋다.’
사실 집안일은 굉장히 단순하다. 빨래를 널고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지극히 단순한 노동일뿐이지만 우리는 그게 '귀.찮.다.' 이제는 청소도 귀찮아지고 허리 굽히는 것도 힘들어진 우리 아바이는 어마이에게 로봇 청소기를 선물했다. 어마이는 '똘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아바이께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똘똘이와 대화를 나누신다. 일방적인 대화지만 사뭇 진지하다. 똘똘이가 더 똘똘한 짓을 할 수 있도록 바닥에 걸거치는 물건을 치우는 것만 아바이 몫이 되었고.
“똘똘아, 이눔아 말을 하면 대답도 좀 해라.”
우리가 만일 그 귀찮음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귀찮음은 다정한 말 한 마디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소원했던 관계에 물꼬를 트는 방법은 아마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귀찮음을 용기로 바꾸는 것일 게다.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를 나눈다.'와 같은 힐링캠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말고, '우리 모두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평등하게 지고 반성하자'고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자. 순간의 귀찮음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성의가 없거나 진심이 아닌 것으로 왜곡 될 수 있으니 용기를 내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부모자식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만드는 모든 관계에서 생기는 굴곡은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꼬리 내리길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서 사라진 꼬리가 다시 자라나길 기대하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관계의 재설정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삿된 말로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도 있지 않은가. 단순한 행동 자체가 심히 귀찮을 것은 알지만 해보면 속이 후련해질 법도 하다. 마늘 하나 빻아도 이렇게나 온 집안이 행복한데 내 자존심 하나 빻으면 분명 남의 집안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하지만 다짐의 순간은 쉽게 잊혀졌다. 잊지 않기로 했던 약속은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다져놓은 마늘은 금세 사라져버렸고 나는 마늘을 빻았던 기억도 잊었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어마이 미소가 마음속에 부풀어 오르면 다시 다짐을 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정도로 합의를 보면서. 며칠이 지나 다시 다짐을 한다. ‘가끔이 힘들면 뜨문뜨문이라도’ 양보의 양보를 거듭해 오늘이 왔다. 어제를 잊고 내일로 미뤄 오늘. 울 어마이 아바이 앞에서 생긋생긋 웃고 있지만 가슴에 무거운 배 한 척 담아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