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일

장재민 : 이영동이 이 녹취록을 듣고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할 텐데.

우사단에 처음 온 건 언제에요?

2012년 1월인 것 같아요. 유상준 씨라고 이두아노를 통한 인터렉션 기반의 제품을 개발하는 디자이너 겸 개발자가 있어요. 그 분의 작업실이 지금은 편집 디자인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저 집(정확한 주소 넣을 것) 이었는데 방을 뺀다고 그래서. 월세가 100에 18만원으로 나왔는데 그때 한창 작업실을 알아보고 있을 때라서. 100에 18만원이라는 조건으로 다른 곳을 알아보았는데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그 당시에 한전부지였던 곳 앞에 노후한 건물 3층. 엄청 조그마한 방. 전화기 놓을 자리만 있는 사무실이 20만원이었어요. 그리고 회기와 외대 사이에 월세 30만 원짜리 2층이 있었고요. “야, 18만원 짱이다. 일단 가보자. 동네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갔는데 처음에 올 때는 이태원역으로 올라오지 않고 한남오거리에서 뒷길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처음 오는데다가 질러오는 길을 모르니까 한참 빙 돌아서 왔어요. “진짜 멀다. 이렇게 오르막길이 심해서야 내가 어떻게 매일 출퇴근을 할까...” 싶었죠, 하지만 18만원이라니까 욕심이 나잖아요. 이야기를 해보는데 그때는 수중에 100만원도 없었거니와 그 당시에는 월세로 18만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고민하고 있었어요. 파리에 간 이정민은 자기가 당장 이 작업실을 써야겠다고, 이 작업실을 써야하면 자기랑 같이 쓰자고. 나는 이런 성격인 애랑 도저히 작업실을 같이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나 혼자 쓰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날 저녁에 여기 저기 전화를 넣어서 돈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정민이 문화부동산이랑 이미 작업실 계약을 해버렸더라고요. 그때가 1월. 18만 원짜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죠. 홍대 앞은 가고 싶지 않고, 너무 멀고. 최대한 이태원 쪽으로 붙고 싶어서 이태원이나 강남 쪽으로 작업실을 계속 알아보았는데 강남은 애초에 포기. 돈이 없으니까. 100에 18도 간신히 융통을 했는데. 그래서 녹사평, 지금 장진우 있는 쪽 일대를 계속 알아보다가 아무래도 가격대비로 보면 반지하거나 해서 다시 이 동네를 와서 뒤지다가 제법 마음에 든 곳이 바로 밑에 상록수 미용실 자리. 그런데 거기는 공사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고민을 하다가 부동산에 연락을 했는데, 그때는 한남사랑이 한남사랑에 안 있고 다원부동산에 있었단 말이야. 내가 맨 처음에 이 동네에 와서 문화 부동산은 이야기하기가 어려우니까 다원에 먼저 이야기 했었단 말이야. 지금 한남사랑 은희언니의 전임, 한남사랑의 원래 사장님이 다원에 있었어. 그 다음에 다원에 갔더니 아줌마는 없고 아저씨가 있는데 아저씨는 신경질만 부리고 매물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뒷길에 있는 이상한 거 비싸게 부르고 그래서 이 양반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부동산을 들어갔는데 다원에 있던 아줌마가 한남사랑에 있더라고. 다원이랑 싸워서 나왔다고. 그래서 상록수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연락이 지지부진하더라고. 알고 보니까 내놓았던 아줌마가 이사를 가려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다시 눌러앉기로 했더라고. 상록수가 불발되고 나서 이 동네를 더 열심히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때도 매물이 많지는 않았고 두세 개 있었는데 그중에서 여기가 제일 넓고 괜찮아서. 월세가 40이긴 했지만. 18만원 생각하고 이 동네를 왔는데 40이면 너무 부담이 돼서 지선이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작업실을 낼 건데 관심이 있으면 스타일 지음 작업실도 같이 내자.” 그쪽도 이제 고민을 하다가 동네가 꽃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외지고, 여기까지 사람들이 올까? 리테일을 하러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지만 월세가 싸니까. 동도 한남동이니까 명함에 넣기에는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함께 쓰기로 하고 이 동네에 왔지. 그때 작업실을 보았던 것이 5월 말. 그때 계약을 하고 바로 공사를 하기 시작해서 한 달을 쭉 공사를 했고 2012년 7월 7일에 오픈식을 하고 보름정도 더 공사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디에 계셨어요?

집에서 작업했지.

집에서 작업하다가 작업실을 낸 거예요?

원래는 홍대에 작업실이 있었는데 내 작업실이 아니라 아는 형들한테 빌붙어 있었어. 그전에는 갤러리 하는 양반 있는데 그 양반 갤러리에 빌붙어 있다가 (BMH라고 말해도 모를 거야. 이야기하면 길어져. 지선이도 거기서 만난 거야.) 디자인 한다는 사람들은 다 거기에 있었어. 그런데 그 양반이 워낙 보통 고집내기가 아니라서. 아무튼 아직도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있어 그 양반. 잘 될 것 같지는 않아. 그 아저씨도 엄청난 양반인데 그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한테 빌붙어 있다가 군대를 좀 늦게 갔어.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할 생각은 없었거든. 군대를 전역하고 그 형네 작업실에 빌붙어서 1년인가 2년 정도 있다가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결국에는 학교에 다시 복학을 해. 학교가 수원에 있으니까 홍대까지 왔다 갔다가 안 되더라고, 작업실도 안 나가고. 학교 다닐 때는 학교랑 집에서 작업을 했고 졸업한 해가 2012년이야. 졸업하자마자 작업실을 알아보기 시작한 거지.

맨 처음에 왔을 때 동네는 어땠나요?

왔을 때 눈에 보이는 디자인 작업실은 유일하게 워크스 하나 였고. 나머지는 한진이발소, 문화사랑, 간판, 두꺼비 식당, 오늘은 열었을 거야, 이슬람 사원, 슈퍼마켓들, 약국, 지금보다는 더 많았던 미용실들, 설비나 인테리어집들, 고물상, 배달밥집, 똥개PC방. 나는 이런 로컬 느낌을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서 들어왔는데.

월세가 훨씬 더 저렴했네요.

지금의 반값이지.

여기는 지금 얼마에요?

여기는 지금 오십오. 아저씨가 60으로 올려달라는 걸 내가 양아치냐고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고. 임대차 보호법이나 월세를 올릴 수 있는 상한선 같을 걸 하나도 안 지키시냐고 이야기하니까 자기가 원래 60만원 받았다고 하더라고. 옛날에 여기가 잘 나갔을 때는.

여기가 잘 나갔을 때면 몇 십 년 전 아니에요?

그러니까 (웃음) 할 말이 없더라. 그 상황에서 또 갈 곳이 없잖아. 우리 입장에서는 올려줘야지. 다만 돈 없으니까 5만원만 깎아 달라. 55만원에 쇼부를 봤지.

청년장사꾼은 더 뒤에 들어온 거예요?

응. 우리가 공사할 때 청년장사꾼이 뒤로 이사를 왔어. 최초의 합숙은 양용수, 연석이형, 윤규 뭐 이렇게 네 명이서 합숙을 했어. 나머지 두 명은 나갔고. 여기에 집을 구하고 사회적 기업 뭐를 받아서 카페 벗을 공사를 시작했지. 2012년 9월에 오픈 했을 거야. 8월 말에서 9월 정도.

계단장을 하자고 한 건 언제부터인 거예요? 연석이형이랑 오단이랑 다 만나게 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