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당은 마을 공동체의 제당

오늘날 서울에는 마을 공동체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예전에는 한남동에도 두개의 마을이 있었다. 한남대교가 생기기 전 개울이 흐르던 시절 있었던, 면사무소가 있는 큰한강마을과 개울 건너의 작은한강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큰한강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인 부군당이 있다. 부군당은 원래 조선 전기 관아 내 신을 모신 곳으로서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관행의례가 시행된 곳이었으나, 이후에 지역민 전체의 공동체 제의를 하는 마을 제당이 되었다. 공동체 정신이 무색해진 이 시대, 여전히 마을 제의를 이어오고 계신 분들을 찾아갔다.

5대째 한남동에 살아오신 이천만 선생(76세)은 ‘큰한강부군당’의 고문이다. 비단 한남동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관심 가져야 할 문화유산 부군당.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

우연히 알게 된 부군당의 건립 시기

부군당이 언제 지어졌는지 처음부터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궁금증을 풀어준 건 보수 공사 때문에 들어낸 대들보 아래서 발견된 상량문이다. <숭정기원능상지32년을미7월29일오시자좌오향입주상량>. 숭정32년은 1659년 18대 임금 숙종을, 을미7월29일오시자좌오향입주상량은 1655년 효종 6년을 의미한다. 숭정기원은 명나라의 연호인데 당시 우리나라는 친명 정책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명의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큰한강부군당 안에는 원당과 별당이 있다. 원당이 본래 부군당이고, 별당은 용궁당이라는 곳이다. 예전에 부군당이 105평일 때 원당은 그 부지의 한 가운데 있었지만 땅을 빼앗기면서 끄트머리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7.8평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원래 부군당과는 별개로 ‘용궁당’이라 하는 것이다. 용궁당은 용신을 모시는 신당으로, 원래 강변도로 위치(한미빌라 468-5호 강쪽 두무개길)에 있었던 것을 도로가 생기면서 이전하였다.

매년 정월 초하루 아침 열리는 부군당제

부군당제는 조선시대 관(官)에서 지내던 것이 민간화 되어 오늘날에는 마을의 공동제의로서 행해지고 있다. 부군당제는 정월 초하루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된다. 이른 아침부터 제를 지내는 이유는 당이 가장 웃어른이므로 다른 집에서 제를 올리기 전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를 지내기 전 섣달 10일에 치성위원회에서 집안에 궂은 일이 없는 사람을 제관(별신굿이나 도당굿 따위의 제주(祭主))으로 뽑되, 그 수는 홀수가 되게 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궂은 곳 삼가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하므로, 목욕재개하고 별침에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한다.

제사 비용은 위원 80여명이 추렴하고 용산구청에서 후원을 받아 마련한다. 주된 제물은 시루떡, 통돼지, 전병, 소적, 삼색 과일, 각종 나물, 북어포, 산자, 튀각, 밤, 대추 등으로 마장동 축산시장, 동대문시장 마을시장에서 구입한다. 음식은 3일 전부터 당에서 마을 아주머니들이 한다. 제를 지내는 날이 오면 주무와 조무, 장구, 아쟁, 피리, 퉁소잡이가 굿을 10시쯤 시작한다. 이 때 치성금을 낸 분들을 위해 소지를 올린다. 이것은 액을 면하고 가족의 건강을 빌기 위함이다. 제가 끝나고 남은 음식은 경로당, 동사무소, 파출소 등 이웃과 함께 나눈다.

갈수록 줄어드는 부군당 계승이 안타까워

요즘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동빙고동, 서빙고동을 비롯한 한강 유역 당주 무당의 계승이 중단된 곳이 많은 실정이다. 이천만 선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야할 부군당이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초대 구의원과 18년간의 새마을협의회 회장으로서 마을 일을 자기 일처럼 맡아온 그가 아직까지 부군당에 그토록 애정을 쏟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인터뷰 - 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