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택리지 한남동팀에서는 한남동의 역사적 변화를 개인의 역사 속에서 잘 보여주기 위해 용산구 이태원로 238(구 주소 용산구 한남동 683-134번지)에 위치한 대성표구사 이명운 사장님(1940년생, 현 73세)을 심층인터뷰했다. 이명운 사장님은 1940년 천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인사동에서 그림 액자를 맞추는 표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31세가 되던 71년도에 한남동에서 자신만의 표구사를 차렸다. 그 후로 2013년 지금, 43년째 한남동에서 계속 표구일을 하고 있다. 한남동은 태어날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던 진정한 의미의 ‘토박이’가 적다. 사장님처럼 젊었을 때 한남동으로 이주해 장사와 삶을 이어나간 이주민들이 대부분이다.

한남동서 43년째 표구일 해 온 대성표구사 이명운 사장님

하지만 최근 한남동의 분위기가 많이 상업화되고 변하면서 그러한 한남동 토박이들은 많이 사라졌다. 아직도 한남동에 남아있는 토박이들로는 합덕슈퍼 사장님과 대성표구사 사장님이 있다. 그 중 대성표구사 사장님을 여러 번 찾아가 인터뷰했다. 미군이나 대사관 사람들 등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은 한남동에서 사장님은 주로 외국인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한남동의 독특한 문화를 느끼고 또 목격했다. 이렇게 한남동에서 살면서 장사를 하신 그의 말을  통해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지금의 한남동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고향이 어디세요?

천안. 천안 독립기념관 있죠? 바로 그 위.

학교는 서울에서 다니셨어요?

아니, 아니. 시골에서. 아침에 5키로 걸어가고, 또 올 때 5키로. 고단해서 공부도 못했어요. 시골, 농촌이라 부모들 도와줘야 되지. 이거(표구사) 하려고 한자 공부 좀 했어요. 서예 같은 것에 많이 나오니까. 한문 공부를 틈틈이 했지. 보면서.

한학 같은 것도 따로 하신 거예요?

우리 다닐 때는 국민학교, 중학교 때까지 한문을 가르쳤어. 내 1953년에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때부터, 그 때는 영어하고 독일어, 두 가지 배우고. 한문은 안 배워.

선생님 인생의 거의 절반 넘게 이 동네에서 보내셨네요.

그렇죠. 내가 71년도 들어왔으니까. 에…, 몇 살 때인가.

결혼 하시고 부터 이 일을 시작 하신 거예요?

내가 40년생이거든. 1940에서 71빼면…?

서른하나였나요?

서른하나? 그 전에는 저기 있었어요. 인사동.

새마을 운동 당시 한남동에 처음 들어와

보통 저희가 알기로는 삼각지 쪽에 표구사가 되게 많은데 어떻게 한남동에 오시게 된 거예요?

삼각지에서 63년도부터 66년도까지 했어요. 소방서 그 앞에. 삼각지에 소방서 있죠? 거기 현대표구사라고 있어요. 옛날에 거기서 근무하다가 군대 갔어요. 67년도에.

(표구일을) 시작한 건 62년부터에요. 직장 생활하다 군대 갔다 와서 일로 차리게 됐어요. 62년도에 고미술화랑으로 유명한 인사동 거리에서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어요. 거기 인사동이 외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해서 그 사람 집에 꼬였어요. 내가 근무하던 데에.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주인이 없을 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영어로 했어. 내가 공부도 좀 하고 그래서, 주인이 없을 때는 내가 손님 받고. 그러다가 내가 나도 독립을 해야겠다, 해서. 71년도에 여기로 나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