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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의 대사관 분포>, 한남동에 몰려있는 대사관, Ⓒ조선영

우사단로에 마을을 아끼는 청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을 이야기하려면, 오랫동안 이 곳에 살면서 마을의 변화과정을 지켜보아온 이들을 빼놓을 수 없다. 한남동이 걸어온 자취를 따라가고자 마을의 터줏대감 분들을 만났다. 오래 전 한남동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며, 기억 속 이야기를 따라 걸어본다.

서울시 아닌 경기도 고양군이었던 한남동

마을 주민에게 들은 약 50년 전의 한남동 일대 행정구역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이곳은 ‘서울특별시’가 아닌 ‘경기도 고양군 한남리 한남면’이었다. 보광동은 옛 산 13번지, 한남동은 옛 산 15번지에 해당되었다. 사람들은 아카시아나무가 많았던 보광동과 한남동의 언덕배기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았다. 언덕 밑은 소나무 밭이었고 이태원은 대나무 밭이었다. 순천향병원 일대는 허허벌판에 주택단지가 덩그러니 있었다.

1957년에 서울시는 한강우회도로 공사지역이였던 한남동 판잣집 450호를 철거했다. 한남동은 1968년 11월부터 1972년에 걸쳐 불법 점유를 사실상 합법화 시키는 방식으로 정착지가 조성되었다. 골조만 지어주고 내부는 주민들이 수리해서 살도록 하였는데, 당시는 대성연탄 한 장에 7원 50전이던 시절이었다.

터키군 머무르면서 이슬람 성원 건립 성사

이곳은 오래 전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오늘날에도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소말리아 등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슬람교를 믿는 외국인들이 많은 이유는 서울에서 하나뿐인 이슬람 성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슬람교는 6.25참전 터키군에 의해 기반이 구축되었는데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경제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의 이슬람교 포용정책에 의해 1976년 이슬람 성원이 생겼다. 처음에는 청파동에 지어지려했던 1층은 개인 집이 있고 2층은 학교가 있던 이광중학교와 터를 맞바꾸었다. 현재 이슬람 성원 부근은 뉴타운 3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80년쯤부터 정부는 아카시아 밭이었던 시유지를 개인에게 팔기 시작했다. 시유지뿐만 아니라 국방부 소유의 땅 또한 그러했는데 현재 장미 아파트(19번지)도 그때 지어진 건물 중 하나다.

인터뷰 - 이수정, 김경현, 성지은, 조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