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99년’ 세기말을 이름으로 한 그룹사운드가 있었다. ‘남자라는 이유로’로 히트를 친 조항조가 보컬로 있던 이 팀에서, 프로 드럼 연주자로 활동했던 드럼랜드 서린악기의 윤석기 사장님은 퇴근 길 우연히 듣게 된 드럼 소리에 이끌려 음악을 시작. 87년 낙원상가에 악기점을 열게 되었다. 낭만이 있던 시절, 윤석기 사장님의 이야기를 낙원상가 블로그가 듣고 전합니다.
“낙원상가에는 음악을 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2층에서 악기점을 시작했어요. 그룹사운드를 하다가, 음악을 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친구와 2층에서 동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게 드럼랜드 서린악기의 시발점이 된 거죠.“
“젊어서 드럼을 쳤고, 그게 직업이었어요. 그때는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일 곳이 낙원상가 밖에 없었죠. 그때는 2층에만 악기점이 조금 있었는데, 그래도 전국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악기를 사려면 낙원상가에 올 수 밖에 없었어요. 저도 낙원상가를 엄청 왔다 갔다 했죠.“
70년대에는 낙원상가 옥상에서 비즈니스가 이루어졌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그룹을 만들고 함께 따스한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악기 곁으로 모여든 음악인들에게 낙원상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음악은) 솔직히 먹고 살려고 했어요. 학교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드럼학원을 지나가는데 드럼소리가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때부터 한 달 정도 있다가 학원에서 먹고 자고 헬파(속어: 그룹사운드를 도우며 배우는 것, 지금의 매니저)도 좀 하고. 그걸 하면서 드럼을 1년 정도 배우고 프로로 시작했어요.
본인의 연주를 ‘옛날 드럼’이라고 말하시지만, 드럼랜드 서린악기는 낙원상가의 드럼 매장 중에서 오너가 드럼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매장이기도 하다. 무교동, 지금은 낙지골목으로 더 유명한 그 길에 이름 있던 ‘태평양’을 비롯해 디스코클럽이 줄지어 있었다. 윤석기 사장님도 머리를 멋지게 기르고 그곳에 드럼 스틱을 들고 있었다.
“일본이나 외국은 음악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운데 우리나라는 그때만 해도 춥고 배고프고 딴따라라는 소리를 들어서 사실 창피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자신 있어요. 음악을 한 것이 왜 창피해요. 저는 사업도 잘 되어서 성공한 케이스죠. 제가 음악을 했었으니까, 음악과 연결 된 것이 악기잖아요. 드럼을 쳤었고, 지금은 타악기라는 브랜드를 우리가 가지고 이정도 크기를 해놓았으면 자부심도 있고 그래요.”
27,8년. 87년부터 지금까지 낙원상가를 지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사랑과 평화’에서부터 ‘윤도현 밴드’까지.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모시고 악기를 사러왔던 학생이 이은미씨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이기남씨였다고. 윤도현 밴드의 드러머도 “사장님 저 산에 들어갑니다.”라며 머리를 빡빡 깎고 3년 있다가 나타났는데 그 1년 후에 윤도현 밴드에서 드럼을 치더란다.
“신기해요. 야, 드럼을 저렇게 잘 칠까. 요만할 때 아버지 모시고 악기 사러 와서, 나는 취미생활로 하나보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니까 드럼을 너무 잘 치더군요. 요즘 사람들은 드럼을 잘 쳐요. 저희 때는 보는 것이 없으니까 턴테이블로 들으면서 음악을 땄어요. 인터넷도 없었고. 옛날에는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으로 듣고 그냥 따서 쳤죠.”
“옛날이 더 끈적끈적 했죠. 어차피 우리는 그때 이미테이션을 했으니까. 신곡이 나오면 미8군에서 먼저 나왔어요. 미8군에서 'Shake, Shake, Shake (KC & The Sunshine Band - Shake Your Booty)'이 나왔다고 하면, 그때까지 일반으로 안 나오고 미8군을 거쳐서 2년 정도 있다가 대중한테, 디스코클럽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음악이 나오고 그랬었죠.”
펑키와 소울, 록이 흥하던 시절이 지나 83년 무렵부터는 디스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기 사장님은 그룹사운드를 그만두고 손님으로 오던 낙원상가에서 매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악기를 샀던 악기점 사장님들도 많아요. 그때는 춥고 배고파서 엄청 배가 고프니까, 먹고 살려고 이 직업을 했었죠. 그때는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드럼을 쳐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마음가짐도 있었고. 그런데 그건 허망했었죠. 우리나라에서는 될 수 없는 허망. (웃음) 재미있었어요. 음악도 재미있었고.”
60년대부터 낙원상가 옥상은 음악인들에게 만남의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친구도 있고 선후배도 있었다. 서로 오디션을 보러갔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클럽과 업소에서 하는 밴드 오디션에서 음악을 보여주면 사장이나 음악을 조금 아는 사람들이 밴드를 정했다. 윤석기 사장님이 그룹사운드를 시작할 시절은 79년도. 페이는 3천 원씩이었다. 택시의 기본요금은 60원이던 시절이다.
“우리 시절에는 시골에서 할 일이 없고, 대학교 들어갈 형편도 안 되었다보니까 무작정 상경한 거예요. 서울에 오면 먹고 살 수는 있으니까. 올라와서 직장에 다녔는데 염창동에 출퇴근하는 길 1층에 음악학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어깨너머로 드럼을 배웠죠. 그러다가 그룹을 하고 음악을 시작한 계기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한둘 있어요. 조항조씨나 ‘봄비’ 부르신 박인수씨도 있고. 제가 마지막에 박인수 형님하고 음악 하다가 그만했어요. 그분이 소울은 아주 최고죠. 지금은 몸이 아프셔서 누워계신데. 조항조씨 하고도 오래 했어요. 한강 나이트클럽, 도쿄호텔, 퍼시피호텔. 무겐 나이트클럽이라고 명동에 있던. 그 옛날에는 디스코텍이 엄청 많았어요. 하얏트부터 웬만한 호텔 지하에는 다 있었죠. 두 팀에서 세 팀 교대하면서 음악이 재미있었어요. (지금 음악 하는 친구들은) 공연을 설 자리가 없죠. 지금도 춥고 배고프죠, 음악은.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정말 인재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죠.”
낙원상가에서 장사한지도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 현재 구내악기 자리는 기다란 라면집이었다. 라면 하나에 천 원. 이백 원을 더 주면 공깃밥을 더 줬다. 서로 돈을 꾸고 한 끼를 때우면 자취방에 가서 연습을 하고 그룹을 지어 지방 나이트클럽도 갔다. 7,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방에도 나이트클럽이 많았다.
“지금은 취미로 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젊은 친구들도 취미로 좋은 음악들 많이 하고요. 옛날에는 다 이미테이션만 했기 때문에 음악이 단조로웠죠. 그대로 따서 곡을 그대로 옮겨서 하는 거죠. (웃음) 음악이 끈적끈적한 맛은 있었죠. 기타 애드립 하나를 하더라도, 산타나(Santana) ‘moonflower’를 하나 한다고 해도 끈적끈적하게 짜는 맛. 그때는 하나를 따더라도 그 기타를 치는 사람과 똑같이 하려고 했어요, 애드립이든 뭐든. 드럼도 그렇고. 그런 걸 맛이라고 해야 하나, 맛이 있었죠. (웃음)”
“저도 Ludwig(루딕)을 썼어요. 그때는 싱글랜드, 루딕, 로져스 밖에 없었어요. 야마하도 없었고 펄도 없었고 Sonor(소노)도 타마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었죠. 그때 저도 코스모스 악기점에서 루딕을 샀죠. 그때 돈 350만원이면 엄청 큰돈이었거든요. 허름한 집 한 채 값이었어요. 루딕 나인을 썼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건데 (웃음)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어요. 쎄븐, 식스, 나인, 텐까지 있었으니까. 루딕이 그때는 가장 유명했어요. 제가 인연이 되다 보니까 드럼랜드 서린악기가 루딕 총판이에요. 루딕은 저희 집에서 다 나가요. 그래서 참 루딕하고는 인연이 많구나 생각이 들죠. 저희가 대리점이 야마하, 루딕인데. 야마하는 저희가 전국 탑이에요. 랭킹 1위입니다. 그 해에 가장 많이 판매하는 대리점에 우수상패를 주는데 해마다 우리가 타죠.“
“처음에는 앰프, 키보드 등을 같이 팔았었는데 어느 친구가 “넌 드럼을 했는데 그걸 살려서 드럼 가게를 해봐라.”해서 드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죠. 그때 한참 교회가 어마어마하게 성장을 할 때여서 웬만한 교회에 다 드럼이 들어갔어요. 붐이 일어나고 그래서 2층 가게를 세주고 창고였던 이곳에 인테리어를 했죠. 그렇게 올라온 후에 중국에 악기쇼가 있었어가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수입을 했어요. 쇼마다 가서. 그러면서 코스모스가 펄 대리점을 따고, 이쪽저쪽에서 대리점을 따서 한 달 매출이 엄청 올라갔죠. 하루 종일 택배 보내고, 낙원상가를 처음 먹여 살린 사람들은 음악인들이었어요. 그 다음에 일어난 게 교회. 우리나라 교회가 부흥한 시기하고 낙원상가가 부흥한 시기가 거의 맞물려요. 우리끼리 하는 말로 교회가 낙원상가를 먹여 살린다고 그랬거든요. 그 시기가 지나니까 교회에서 악기를 접했던 교인들이 개인 취미생활로 구입을 하죠.”
“그때는 드럼이 한 달에 100~130 조. 세트로 나갔어요. 지금은 전자드럼이 대세죠. 요즘은 헤드폰만 끼면 아파트에서도 다 칠 수가 있어요. 저희도 저쪽으로 집중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보면 기타보다 더 나가는 것이 드럼 같아요. 옛날에는 기타부터 배웠는데 지금은 드럼부터 배우는 것 같아요. 드럼도 다양화되었고 사람들이 좋아해요. 옛날에는 아파트에서 칠 수가 없었고 지하 아니면 연습실이 있었어야 했는데 지금은 헤드폰 끼고 치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