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2층 55나, 85호. 40여 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악기전문점 에클레시아의 박주일 대표님은 장인어른의 뒤를 이어 23년 동안 낙원상가에서 근무해왔습니다. 10년간 번영회 총무를 맡으면서 낙원상가의 든든한 바람막이 되어온 것은 물론이고, 관심과 애정으로 낙원상가를 지켜온 에클레시아 대표 박주일님을 우리들의 낙원상가 블로그가 만나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교회 믿는 자.’ 처음 문을 열 때 목사님이 지어준 이름 에클레시아는 낙원상가에서 40년을 버텼습니다. 낙원상가 건물이 올라가고 2,3년 뒤 입주한 에클레시아는 그 당시 수요에 비해 부족했던 악기업체의 대안으로 악기 렌탈과 판매로 영업을 시작. 현재는 기타, 우쿨렐레, 앰프, 그룹사운드 위주의 악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박주일 대표님은 어떻게 낙원상가에 오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낙원상가 말고 외부에 악기업체를 다니고 있었어요. 영창악기 관련해서 기타를 공급해주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낙원상가에 악기를 대주는 입장이었죠. 우리 집사람을 후배의 소개로 만나서 처음에는 서로 뭐하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아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참, 만나려다보니까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되더라고요. (웃음)”

악기와는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을까. 박주일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의 우연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주일 대표님이 친구들과 동아리, 클럽 활동으로 시작한 기타는 대학까지 이어졌고 그룹사운드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군대에서도 차출되는 바람에 군악대를 가게 되었고 제대 후 첫 직장도 악기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운명처럼.

“어떻게 보면 외길 인생이에요.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기 보다는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 애까지 음악을 해요. 선화예고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는데 지금 유학 준비하고 있어요.”

“저는 절대 이쪽으로 안 오려고 그랬어요. 많이 했으니까 이제 악기 쪽은 그만해야지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식구들이 내팽개쳐 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씀도 하시고, ‘안 접을 거면 끌고 챙겨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집사람도 의무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서 나한테 이야기하기에 고민하다가 해보자고 한 것이 벌써 23년이 되버렸죠.” (웃음)

23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지나온 시간을 박주일 대표님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하나의 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보니까 좋은 일, 안 좋은 일, 잘 될 때, 안 될 때, 다 있잖아요. 나도 똑같죠. ‘초창기에는 낙원상가로 잘 올라온 것 같다.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아는 분야니까 편하구나.’ 한 쪽 길만 오다보니까 아는 사람도 많았고 속도도 조금 빨랐어요. 나이는 20대였지만 그런 부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걸 다시 만들고 가려면 진짜 힘든데 그게 요만큼 먼저 있었잖아요.”

‘그때는 잘 몰랐다.‘ 친구들, 선후배들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다는 것을. 서로 조금씩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다른 사람에 비해 유리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유리한 것인지 모르고 ’그냥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이 길. 지금은 이 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조금 있다는 박주일 대표님. 누구나 그럴 것이다. “조금 더 무언가를 해볼 걸, 하는.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 그때는 그렇게 안 보이더니.”

“아마 직업을 안 가졌다면 계속 음악. 어디서 세션을 하거나 음악 관련한 라이브 클럽을 한다거나 관련된 쪽에서는 있었을 텐데. 비슷한 일을 했을 것 같아요. 가르치는 쪽이라든지.” 낙원상가에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박주일 대표님의 인생도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어떻게 흘러갔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직도 하시는 분들이 조금 남아있어요. 4분의 1정도는 남은 것 같아요. 자기가 음악전공을 했는데 음식점을 한다든지 회사를 다닌다든지. 비슷한 일은 직접 실전으로는 뛰지 않지만 학원을 한다거나 악기를 한다거나 기획사를 한다거나 약간 연결된 쪽을 많이 하시죠. 현장에는 끝까지 질기게 남아있는 선후배들도 있죠. 갑자기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기에는 무섭죠. 발이 깊이 들어가면 깊이 들어갈수록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만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인사동 남사마당에서는 낙원상가 활성화 방안으로 몇 년 전부터 직장인 밴드경연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낙원상가 상인들이 모두 모여 십시일반 힘을 모으고, 기획부터 박주일 대표님이 이끌어 온 이 행사에서 대학 때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삶에 운명 같은 일은 끝없이 벌어진다.

“그때 친구를 만났어요. 어디서 뭘 해먹고 사나 되게 궁금했는데 어떻게 알 수가 없었던 친구였죠. 옛날에는 서로 군대에 막 가느라고. 낙원상가 주최의 직장인 밴드경연대회 예선을 하는데 어디서 비슷하게 생기고 이제 머리도 조금 까진 친구가 있어서 “00야!” 불렀더니. 야...... 그때가 얼마 만에 만난 거야. 근 30년도 더 돼서 만난 건데.“

그렇게 다 만난다. 함께 음악 하다가 당시에 여차저차 돈 빌려줬던 친구들도 낙원상가에서 다 만났다며 웃는 박주일 대표님.

“여기가 그런 곳이에요. 어디를 갈 거야. (웃음)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외부에도 전국적으로 규모가 있는 악기점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뭐 좀 하려면 부산이든 대전이든 대구든 첫차 타고 여기까지 와야 해결이 되었거든. 지금은 택배로 하루면 가지만 그때는 고속버스로 물건 보내줬던 시대였으니까.”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했던 악기종합상가, 낙원상가는 그렇게 대한민국의 음악 역사에 이바지하며 시간을 쌓아갔다. 지금은 온라인 매장도 오프라인 매장도 수없이 늘어나 수치상으로는 전국적으로 7000여 곳. 이 조그마한 나라에 엄청난 숫자다. 그 많은 매장들 가운데서도 낙원상가에 직접 와서 구매하면 좋은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인터넷으로 음식을 사든 옷을 사도 반품율이 있잖아요. 확인되지 않으니까. 사진으로 입체감 없이. 보고. 맛보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에 오는 이유는 실물을 확인하고 듣고 만지고 보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많고, 다양한 것 중에 골라서 사야하니까. 사람이 흥정을 하면서 뭐라도 조금 더 얻어가든지 DC라도 받고 그러는 거죠. 차후에 AS문제가 생기더라도 매장이 없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까 편하고요.”

의기와 좋은 아이템으로 시작했던 인터넷 업장들의 성공한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 어디를 가든지 잘 하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겠지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 인터넷 업장들은 취급했던 브랜드가 공중으로 붕 뜨는 경우가 많다. AS할 때도 소비자 측에 불리하고 아무래도 오프라인보다는 심적, 물질적 안정감이 덜 하다.

“꼭 맹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터넷 정보를 최고의 지식으로 알고. 그렇지만 온라인상에서 홍보하는 것이 돈으로 되는 거지 진짜는 아니거든요. 맛집도 그걸 보고 가보면 맛집은 하나도 없다고들 하잖아요. 악기도 마찬가지거든요. 세상이 그렇기는 하지만, 매장들이 다 온라인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오프라인 매장을 한다는 것은 확인하고 만져보고 물어볼 것도 바로 물어보고 답변을 받아서 지식도 얻어가기 위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단골 차원이 있잖아요. 기타줄 하나를 사러 왔다가도 사실 점심 때 걸리면 같이 자장면도 시켜먹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나면 사람이라는 것이 오천 원짜리 줄을 하나 사더라도 육천 원짜리 자장면을 사줄 수도 있는 거고. (웃음) 진짜 그렇다니까요. 인간은 그런 맛이 있는 거죠.”

사람냄새 폴폴 나는 낙원상가. 박주일 대표님이 기억하고 있는 낙원상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때는 언제든지 와도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뚱땅뚱땅. 악기 소리는 계속 났던 것 같아요. 바이올린 소리가 나든 드럼 소리가 나든. 이런 말이 인터뷰에 들어가서 상가 이미지가 떨어지면 안 되지만 지금도 보면 분위기가 예전의 분위기보다는 활기를 잃었어요. 최근에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기가 그렇고 국내 모든 경기가 안 좋다보니까.”

“그때는 오면 왠지 가슴이 약간. (웃음) 나뿐만이 아니라 다 그랬어요. 내가 손님이었을 때, 손님으로 오던 사람들도 “내가 학교 다닐 때 여기에 와서 이거 한 번 쳐다보고 가고, 가슴 뛰고 그랬어요.”라면서 그때는 돈이 없어서 못 샀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사고 싶었던 걸 산다는 분들도 있거든요. 나도 그때 오면 설렘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낙원상가에서 밖에 못 보니까.“

그 당시 동네 악기점에서는 통기타 몇 대, 피리나 리코더, 교재용 실로폰 밖에 없었다. 앰프, 음향시스템은 물론 뮤직비디오에서만 보았던 악기들이 낙원상가 오면 다 있었기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뛰는 곳이 바로 낙원상가였다. 주상복합 상가로 시작했던 낙원상가는 악기 쪽이 활성화되면서 조금 있던 다른 분야 매장들이 밀려나고 도태되었다. 악기점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악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