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풀잎 작가가 5 년간 쓰고 고친 75편의 연애 에세이.

인생은 오늘도 최선의 최악입니다. 꿈을 꿉니다. 글 속의 그녀도, 글을 쓴 그도, 그녀도 그도 아닌,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꿈을.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영원’을

채풀잎

진심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건가요.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나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서, 어디서나 손잡이를 찾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을 손잡이처럼 여겼던 내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방금 내린 커피가 정말 맛있어서 짧은 글을 남긴다. 집앞 커피집에 부탁해 구입한 만델링. 부엌에 그럴싸한 핸드 드립 도구는 없지만 커피는 시간을 넉넉하게 만들어준다. 자, 한 잔을 모두 비우고 나면 독한 담배를 피우고 예전에 당신이 내려주었던 커피 맛을 잊어야지. 13

가끔은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날이 오면. 문득, 새벽 별이 당신에게 했던 맹세 같을 때. 별똥별처럼 떨어지고 사라져버렸지만. 저 멀리 풀벌레 소리, 풀잎들이 부딪히는 소리, 당신의 발자국 소리 아득하게 들려오면 눈을 감고 생각하던 당신의 입꼬리. 선명한 눈꼬리. 15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온갖 단어를 들먹이며 너를 표현하려 애쓰지는 않았을 거야. 나의 시도, 나의 노래도 아직 너를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걸 보면 네가 나에게는 가장 완벽했다는 것이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는 참, 미안하게도. 31

텅 비어버린 날들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두렵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사랑이 지나간 자리, 모두 폐허. 아무 의욕도 생기지 않고, 아무 욕심도 아무 감정도 이제는 일지 않는다.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겨 던지며 가만히 앉아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 사랑 없이도. 38

사랑의 편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더 뜨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의 발로다. 아직도 과거의 그, 앞에서 맴맴 돈다. 51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는 가정을 해보자. 이별 후에 서로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89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조차 사치라면 나는 사실 사랑의 값어치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사랑의 값어치 또한 변해버린 걸까. 110

오래전 보았던 사람이 그리워졌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이 기대됐던 나인데,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더니 어느새 몸을 돌려 내 걸음은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이 책에 적힌 너를 잊을 수 없다는 반증의 기록들은 우리를 작고 낡지만 가장 황홀했던 사랑의 역사로 데리고 갈 것이다. / 김은비 (꽃같거나 좆같거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