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을 기리는 긴 시간 동안 찢었던 편지 조각을 다시 이어붙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끝난 이별을 되돌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이정표를 과거에 남겨두고 온 탓에 손끝으로 말의 표면을 더듬어야만 했다. 눈을 감아도 찰나의 순간이 장편영화처럼 상영될 수 있도록, 눈을 뜨면 내일이었던 오늘을 홀로 맞이할 수 있도록. 누군가 쓸 수 없을 거 라던 짧은 글에 온몸이 젖은 채, 그렇게.

나는 너라는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맑음

낱장의 숲을 지나, 여백의 강을 건너,나는 너라는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렇게. 아름답던 코스모스를 기억하고자,사랑을 노래하듯이, 모든 꽃이 시들어 버린 세계로.

그는 묵은 씨앗에서도 꽃은 피고, 그 줄기에 가시도 돋힌다는 걸 안다. 그래서 버리지 못한 물건이 더러 있다. 그녀가 찍어주 었던 사진 몇 장과 함께 가고자 했던 영국 여행책에 붙은 포스트 잇이 언젠가 꽃으로 피어날 씨앗인 것 마냥, 밤이고 낮이고 물 을 주면서. 9

요즘은 아침을 일찍 맞는다.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식사를 한 다. 네다섯 잔 정도의 커피를 마셔도 지워지지 않는 커피맛이 있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도 지 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기에 커피를 마실 때마다 떠올린다. 분실 했지만 분실하지 않는 분실물. 11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이름. 과거로부터 떠올라 방긋 웃는 얼굴. 젖은 풀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처음 온 도시의 햇살 을 담아둔다. 떠오르고 떠올라 나를 삼키는 이 어둠을 밀어내고 자. 햇볕을 위로하는 눈물을 흘리고자. 이 계절 아름답던 코스 모스를 기억하고자. 13

당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려고, 오늘도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20

어떤 밤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감정을 위로하기도 한다. 24

한강변을 달리는 택시. 기사님이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이름모를 팝송을 틀어준다. 나는 왜 눈물이 흐르고. 30

새벽에 깨어 펑펑 울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저주가 가득한 지옥에서 산다. 33

그리고 어젯밤 꿈에서는 ‘꽃을 살 돈이 없어, 그녀의 손을 잡고 꽃밭으로 달려갔다’는 사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41

아이와 보폭을 맞춰 걷는 사람들. 왜 이렇게 늦냐고, 왜 그렇게 뛰어가느냐고 화내지도 보채지도 않고. 아장아장 폴짝폴짝 한 걸음, 그 걸음. 49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던 날, 밤을 보내고 새벽을 보내 고 아침을 맞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 야기했지. 과거에 묶여있지도 현재에 머무르지도 미래를 두려 워하지도 말자고 굳게 맹세를 했었는데. 내가 그날 부탁한 건 단 하나뿐이었잖아. 이제 두 번 다시는 내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 지 않기로.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