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1969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준공된 낙원상가는 근대화의 상징적인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미래유산 중 하나가 된 낙원상가. 인터넷을 통해 본 빛바랜 사진 속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낙원상가 번영회 회장이신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님과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김지화 대표님이 낙원상가에서 조율을 배우기 위해 왔을 때는 악기점만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경은상사가 있는 자리도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 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맞은편은 교복과 교련복을 파는 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아용품, 유치원 교재 등을 만들어서 공급해주는 보육사도 지금은 엄청 큰 회사로 발전했지만 그 당시에는 낙원상가에서 시작한 작은 회사였습니다. 낙원상가는 1세대 주상복합 건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양복점과 가구점, 양품점과 전자제품 매장이 있을 정도의 종합 쇼핑몰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낙원상가에 악기 상점이 많아지게 된 건 충무로 있던 악기점들이 오디오 가게나 옷가게에 밀리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충무로 악기상들이 그만두거나 한두 집씩 낙원동으로 올라오고, 탑골 공원 담벼락을 두르고 있던 2층짜리 파고다 아케이드가 헐리면서 그곳에 있던 악기점들이 낙원상가로 와 더 많은 악기점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점포가 비면 그 자리를 악기가 채우고 비면 또 채우고. 제가 27년 전에 다시 낙원동에 왔을 때는 악기상가로 거의 갖추어져있었어요. 30년 전부터는 본격적인 악기상가로 자리매김한 거죠.”
3층에는 유명했던 낙원 볼링장이 있었고 4층에는 123 캬바레, 허리우드 다방을 비롯해 국제대회가 열리곤 했던 허리우드 당구장이 있었습니다. 2층만 악기상가였던 낙원상가는 우리나라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함께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욕구도 높아지면서 악기시장도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악기시장은 점점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마틴 본사에서 열린 인터네셔널 딜러 회의에서 만난 일본 마틴 총판 사장에게 물어봤어요. “한국에서는 기타가 잘 안 나가는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많이 팔립니까.” 그랬더니, 자기들도 힘들었는데 소득이 2만 불이 넘어가면서부터 반응이 오고 3만 불이 넘어가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한국은 소득이 1만 불도 안 될 때였어요.“
2015년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진입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가 빠른 시간 안에 이렇게 성장하게 된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이 인터뷰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낙원상가에 있으면서 즐거운 일은 없었을까. 다시 이야기를 이어 김지화 대표님께 낙원상가에 있으면서 가장 보람되었던 일을 물었다.
“보람이랄 게 뭐 있나. 예전에 저희 가게에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한 사람들을 보면 뿌듯해요. 저 친구들 어렸을 때 우리 가게에 왔다 갔다 했었는데, 내가 참 예뻐하고 그랬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가장 뿌듯하죠. 그리고 내가 옛날에 동경했던 송창식씨, 조영남씨나 우리 때 환호했던 어니언스 같은 뮤지션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친해진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죠. (웃음)
경은상사에는 어니언스 임창제, 해바라기 이주호, 이정선, 양병집, 한대수와 같은 통기타 가수들이 계속 찾아주고 있다. 지금은 모두 아는 국민가수가 된 윤도현씨도 무명일 때는 경은상사를 찾아주었다고 한다. ‘사랑을 위하여’를 불렀던 김종환씨도 무명으로 고생할 때부터 경은상사를 찾았던 뮤지션 중 하나였다.
힘들었던 뮤지션들의 기타를 많이 손 봐줬던 김지화 대표님은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에도 후원의 손을 뻗쳤다. “그때 당시에 영창악기의 영창 기타를 내가 국내에 독점으로 공급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영창 기타를 선전하기 위해서 어디로 할까 하다가 이 친구들을 한 번 후원 해줘보자 해서...”
노찾사에서 간사 일을 보던 나동민씨의 소개 받아 노찾사 연습실에 기타도 제공해주고 그랬는데 이 소문을 듣고 서울지역 대학 노래패 연합(서대노련)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민중음악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