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부자 동네' 중 단연 최고는 아마도 대한민국 재벌들의 저택이 몰려있는 한남동일 것이다. 그러나 한남동을 말할 때 재벌들의 이야기만 나눌 수는 없다. 언론과 방송이 말하지 않는 한남동의 이면에는 다문화와 근현대사, 사람 사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한남동의 다문화는 현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다국적 문화가 아니다. 단순한 뜻의 ‘다양한 문화’로 각기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문화형태를 말한다. 한남동에는 이곳, 저곳 혼재되어있는 부촌과 빈촌으로 인해 형성된 생활문화와 젊은 예술인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는 문화, 미군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문화들이 공존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태원과 붙어있는 한남동은 이태원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정서상 한남동 일부지역을 이태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남동을 말할 때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태원은 침략의 역사, 설움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 그 이후 일본군 부대자리에 위치한 미군들. 그 때문에 한남동과 이태원은 한국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모습과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남리와 보광리-. 그리고 현 한남동과 보광동에 정착한 주민들은 하꼬방을 짓고 살았다. 국방부 소유의 땅이거나 시유지, 미군부대가 있던 한남동, 특히 유엔빌리지 일대는 경관이 좋아 대사관과 공관이 많이 자리 잡았다. 1979년 12.12 군사 쿠테타 때 정승화 수도경비사령관이 강제연행 당한 공관도 이 부근, 한남동이었다.

우사단 마을은 판자촌, 수재민들이 많이 몰린 동네였다. 72년 대홍수에 많은 것이 떠밀려갔어도 사람들은 남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마을도 국가와 시의 정책을 통해 변해갔다. 1957년 서울시는 한강우회도로 공사지역이였던 한남동에 위치한 450호의 판잣집을 철거시켰고, 1968년 11월부터 1972년까지 서울시는 한남동을 양성화지역으로 책정했다. 80년쯤부터 아카시아 밭이었던 한남동의 시유지를 불하(拂下)하기 시작했고 국방부 소유의 땅 역시 개인에게 불하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남산 아래 재벌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고 지금 언론에서 다루고 있는 부촌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현재 한남동은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강남으로 가는 교통이 편한 한남동 T자 골목에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들고 있고 이슬람 사원 앞 우사단 마을에는 저렴한 월세 탓에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플리마켓과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사이사이 프로젝트와 마을 신문과 마을 장터 이태원 계단장을 열고 있는 우사단단도 있다. 한남동의 큰 도로는 변화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지만 작은 골목들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김경현 조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