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책임지는 기타전문점, 경은상사

낙원상가 번영회 회장이자 경은상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지화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낙원상가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37년. 피아노 조율사로 시작해 기타전문가로 자리매김한 김지화 대표님의 이야기를 통해 낙원상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낙원상가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께는 추억을 되새김할 살아있는 역사. 우리들의 낙원상가 블로그가 귀담아듣고 왔습니다.

87년부터 낙원상가를 지키고 있는 ‘경은상사’는 무역도 하고 꿈을 거창하게 갖자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맨 끝 자리여서 ‘코너 하우스’로 시작했던 경은상사는 분식집 이름 같다는 생각에 1년 만에 이름을 바꾸고 27년째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처음에 같이 시작했던, 제가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신 선배분이 계셔요. 양쪽 집 딸들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경은상사로 했어요.” (웃음)

경은상사를 운영하기 전부터 악기 계통에서 일을 해온 김지화 대표님. 20대 초반서부터 낙원상가에서 일해 올해로 37년,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조율을 배우고 삼익악기 대리점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가 다시 낙원상가로 왔다. 왜 악기였을까.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운명처럼 마주칠 때가 있다.

“왜 악기를 하게 되었냐면 내가 조실부모하고 힘들게 자랐어요.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지만. 우리 외삼촌이 캐나다에 이민을 가셔서 자리를 잡고 사셨거든요. 그때만 해도 부모 없는 조카들은 직계가족초청이 되었는데 직계가족초청을 하려면 캐나다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어요. 그때 유명한 직업이 자동차 정비, 용접, 전선...”

캐나다에서 전화국을 다녔던 외삼촌은 유망한 직업을 적어 보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일거리가 많으니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 하지만 김지화 대표님의 눈에 띤 것은 피아노 조율사였다. 너무 멋있어 보여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위해 낙원상가에 들어온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대표님의 말씀.

병역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바뀌어 버린 이민법 때문에 눌러앉게 된 김지화 대표님은 “모든 일에는 우연찮게 계기라는 것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좋았던 음악시간, 악기를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했던 기타, 연주는 못하지만 피아노 같은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조율을 익히고 조율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불기 시작한 피아노 붐은 피아노 보급률이 많아지고 조율사에 대한 수요도 있어서 20대부터 조율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삼익악기 대리점에서 10여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돌아온 낙원상가. 중고 피아노 가게를 시작해보려고 점포를 얻으러 동분서주하던 김지화 대표님에게 또 다시 운명 같은 조언이 날아든다.

“그 당시 낙원상가에 계시던 현악기를 하시던 선배분이 ‘요새 기타 가게가 잘 되니까 기타 장사를 해보는 건 어떤가.’하고 조언을 해주시고 내가 기타를 좋아하기도 해서 시장조사를 시작했죠.”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과외금지를 했던 당시 지금처럼 PC가 많이 보급된 것도 아니라 할 것 없던 학생들이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헤비메탈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물밀 듯이 몰려와서 기타를 샀던 시절. 김지화 대표님은 정확한 판단으로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겨 기타 가게를 오픈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나도 삼익악기에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삼익악기에서도 기타가 많이 나왔어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건 세고비아 기타였죠. 세고비아, 삼익, 영창, 기타 등등의 브랜드 제품들이 있었고요. 몇 년 뒤에 콜트 기타가 시판을 했죠.”

회사 규모들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악기를 구할 수 없어서 기타처럼 생겼으면 다 팔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종로 2가 로터리에는 세고비아, 중앙악기 같은 큰 악기점들이 있었고 지금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들어와 있는 건물은 중앙악기가 쓰던 건물이었다.